윤지하, 현대미술에 동양화를 입히다."속이 텅 빈 소라 껍데기에서 찾는 지난날의 바다"신진 작가소개 현대미술에 동양화를 입히는 윤지하 작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윤지하 작가는 허무에 대한 생각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 지극히 평범하거나 때로는 극적인 삶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인 광경을 화면에 그린다. 신진작가 윤지하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림> 자화상 no.1 (Self-portrait no.1), 장지에 먹, 콩테 134x100cm 2018 / 사진=Courtesy of artist, 갤러리도스 작품 <자화상 no.1> 색의 사용이 최대한 절제된 이미지는 앞서 이야기한 구체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음에도 종이에 스민 먹과 건조하게 묻은 콩테의 텁텁한 효과로 희뿌연 연기처럼 부유하는 듯 보인다. 손을 휘저으면 일그러지고 사라질 듯 옅은 이미지는 알 수 없는 표정의 인물이 지닌 저마다의 대단하거나 사소한 고뇌처럼 고요하다. 재료로 먹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장르에 구분되지 않고 구분될 필요도 없이 동시대적인 감수성으로 그려졌다. 풍경이 보이는 작품의 경우 상황에 대해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을 만큼만 그려져 있다. 희미한 단서들로는 단정 짓지 못하는 시간대에서 완전히 캄캄한 인지 너머의 공간도 아니며 밝은 빛 아래 드러난 익숙한 세계도 아닌 어스름의 영역에 멈춰있다.인물들은 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지만 관객이 알 수 없는 복잡한 생각에 잠겨있는 듯하다. <그림> 두 개의 밤 Two Night, 장지에 먹, 분채, 콩테 136x134cm 2019 / 사진=Courtesy of artist, 갤러리도스 작품 <두 개의 밤>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무신경하고 누추한 표현으로 미묘하게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지닌 화면 속 광경은 이미 일어나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로 가득한 오늘날을 살아가는 청년의 눈에 비추어진 세상이기도 하다. 최선을 다해 소극적으로 필요한 정도만 그려진 얼굴에 대한 궁금증은 어쩌면 화면에 보이는 상황이나 인물이 지닌 이야기에 호기심을 갖는 관객의 습관적인 사고이자 타인의 시선을 크게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관계가 지닌 적극성에 길들여진 감상이기도 하다. 얼굴의 정체는 앞서 이야기한 시선으로 인해 나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당사자이자 타인의 표정일 수도 있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목소리가 필요하다. 환경과 타인을 향해 뿜어내는 소리는 소통을 이루어내고 서로가 원하는 바를 빠르게 전달하지만 충돌과 갈등을 동반하기도 한다. 내뱉지 않은 소리는 살과 뼈로 이루어진 통 안에서 맴돌다 생각이 된다. 그러다 마음에 따라 모양이 변하기도 하며 기약 없는 선택을 기다리며 가슴속에 흐른다.강렬한 아우성의 흔적을 새기기 위해서는 단단하고 큰 벽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지막한 한숨은 표면에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투명한 유리면 충분하며 애초에 그 어떤 표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잠시 몸 밖의 무언가에 서렸다 한들 곧 사라지고 의도와 의지에 관계없이 누군가의 들숨이 될 수도 있다. 덧없는 가벼움은 삶을 무의미하게 여기는 허무주의가 아닌 껍질을 지니지 않은 상태이자 이름으로 불리기 전의 텅 빈 오롯한 자신에 대한 열망과 탐구심으로 시작되었기에 윤지하가 이야기하는 공허와 허무는 세상과 타인이 아닌 자신을 향한다. <그림> 마지막 문 Last Moon, 장지에 먹, 콩테 210x150cm 2019 / 사진=Courtesy of artist, 갤러리도스 작품 <마지막 문> 나의 작업은 삶과 존재의 허무에 대한 자화상이다.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해 고뇌하는 인간들과 인생, 살아감 속에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공허와 허무의 양면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본래적 자기를 찾으려 부단히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이유를 묻는다. 어떠한 목적이나 이유가 있어 생겨난 것들과 달리 인간은 자신이 존재하는, 존재하기 위한 혹은 존재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묻지만 그 물음에 대해서 그 어떠한 확고한 답변도 얻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인간의 의미 요구와 세상의 침묵간의 괴리가 인간을 끊임없이 심연에 빠져들게 만들고 알 수 없는 그 심연의 끝에는 언제나 허무와 공허가 뒤따른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허무란 무가치하고 덧없는 것이 아닌 자유로움이다. 차면 비우고, 왔으면 가고, 시작하면 끝내고, 비면 다시 또 채우는 등 흘려보내고 비움으로써의 자유로운 공, 허, 무이다.인간의 본질, 인생의 본체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기에 무가치하고 무의미해서 허전하고 쓸쓸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기에 되려 자유로운 것 말이다. 비어있음으로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혹여나 내가 생각한 가치와 의미가 그것의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리거나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할 때 그것에 대해 왜?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다양함과 자유로움으로써의 비움의 상태 말이다. <그림> 어떤 것들은 영원히 알 수가 없다, 장지에 먹, 분채 200x140cm 2019 / 사진=Courtesy of artist, 갤러리도스 작품 <어떤 것들은 영원히 알 수가 없다> 달빛이 내리는 밤에 춤을 추는 모습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찰이 만들어낸 무거운 분위기를 해소하듯 무대의 장면처럼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있다. 실제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어느 방향에서는 우스꽝스럽게 보이기까지 하는 몇몇 이미지들은 작품들이 전체적으로 지닌 진중한 분위기에 모순을 이끌어내며 공간을 풍부하게 만든다. 타인에 대한 시선에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있을 수 있다. 속이 텅 빈 소라 껍데기에서 멀리 떠나온 지난날의 바다를 차분히 들을 수 있듯 더 자세히 알고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채우고 있는 이름과 모습을 다 벗겨낼 필요가 있다.